본문 바로가기
읽는즐거움/이지적 성

알랭 드 보통 - 인생학교 | 섹스 ; 누가 정상인가

by Desmios 2015. 6. 12.
인생학교 | 섹스 - 4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미나 옮김/쌤앤파커스


  알랭 드 보통의 이름을 단 책이니 만큼 나는 그래도 꽤 기대를 했다.그러나 섹스에 관한 한, 단순 지식서가 아니고서야 저자의 주관적 의견이 거슬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인 것 같다. 몇몇 서평에는 새로운 시각, 신선한 발상 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이미 어디선가 들어봤던 얘기들 인데다가, 그런 진부한 얘기를 자기만 독특하게 생각한 것 마냥투는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말인즉슨, '알랭 드 보통'이 생각한 '섹스'라면 흠,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가보다 하고 즐겁게 읽을 수도 있지만 '인생학교 - 섹스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는 법'이라고 하면 난 이정도 생각도 해! 너희 일반인과는 다르게 흥!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이다.  


... 사실 맹렬히 까는 것 같이 써놨지만 분명 읽을 때는 흥미로운 구절 들이 있었다. 그런데 독후감을 쓰려고 보니 생각나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걸로 봐선, 결국 남는 게 하나 없는 책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페티시에 대해 쓴 알랭 드 보통의 글을 보자.


페티시즘 - 선량함 (압축, 생략한 부분 많음)

pp.58-66


  '페티시'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흔히 극단적인 이미지를 먼저 떠올린다. 특정 신체 부위나 특별한 의상, 이를테면 긴 손톱, 가죽 브래지어, 마스크, 체인, 그물 스타킹을 연상하며, 정신병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임상적 의미에서 정의하자면, 페티시는 어떤 사람이 오르가슴에 이르기 위해서 꼭 필요한 요소로서, 그 요소가 사실상 아주 유별난 편에 속하는 경우를 전형적으로 일컫는다. 


  몇몇 극단적 사례들을 보면 미친 사람들만 페티시 성향을 갖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명백한 착각이다. 세상에는 극단적이거나 이해할 수 없는 페티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알고 보면 누구나 이런저런 식으로 페티시스트다. 다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성향이 다소 온건한 편이어서, 애착을 느끼는 그 대상물에 의지하지 않고도 성관계를 잘 해내는 것뿐이다. 이렇게 의미를 확대해보면, 특정 종류의 옷이나 다른 사람의 신체 부위와 관련된 페티시는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조금 더 깊이 따져보면, 페티시는 인간의 본성이 가진 바람직한 측면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그런 애착을 갖게 된 정확한 원인이 불분명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어린 시절의 어떤 상황이나 사건과 관련이 깊다. 가령 애착을 가진 특정한 대상물이 사랑하는 부모님의 모습 중에서 특히 좋아해던 모습을 떠오르게 해줄 수도 있다. 아니면 반대로 어린 시절에 경험한 굴욕이나 공포의 기억을 어떤 식으로든 상쇄시켜주거나, 그 기억에서 도망가게 해주어서 그럴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자신의 애착 성향을 이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플라톤의 <향연>을 보면, 소크라테스가 만찬 자리에서 벌인, 사랑에 대한 유명한 토론이 나온다. 의도치 않게 불쑥 나온 말인 듯싶긴하지만, 어쨌든 그 토론에서도 페티시에 대한 흥미롭고도 돌발적인 설명이 나온다.

  플라톤은 아리스토파네스를 자신의 대변자로 삼고 훗날 '사랑의 사다리Ladder of Love'라고 일컬어지는 이론을 설파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시각을 통해 마음이 끌리는 것은 궁극적으로 단순한 시각의 차원이나 물질의 차원을 넘어서, 플라톤이 말하는 이른바 '선Good'이라는 더 폭넓고 긍정적인 범주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물질세계를 관념과 미덕의 세계로 이어주는 이런 '사랑의 사다리 오르기 이론'은 페티시에 구원의 빛줄기를 던져준다. 그것들은 부적절한 욕망이나 격정을 일으키는 것 외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쓸모없기는커녕, 모든 페티시는 타인에 대한 사랑을 가장 위대한 경지로 격상시켜주기 위해 사다리의 맨 아랫자리를 지키고 있는 희생적이고 고귀한 존재다. 즉, 우리가 페티시에 흥분하는 이유는 그것이 '선'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일견 그럴 싸 해 보인다. 페티시와 애착, 무의식을 연계하고 플라톤의 <향연>이 나와 사랑의 사다리 어쩌고 한다. 난 플라톤의 <향연>읽지 않았다. 그게 뭔소린지 모르겠다. 그런데 사랑의 사다리를 들어 페티시를 설명하면서 사랑의 사다리가 뭔지는 안 알려준다. 자기가 알고 있으니까 남들도 다 안다고 생각했던 게 틀림 없다.

  더 심각한 것은, 그래서 사랑의 사다리가 뭔가 하고 찾아봤더니 페티시의 '페'자도 안나오는 것이다. 굳이 연결 시키자면 그럴 수도 있는 말인 것 같기는 한데 영 찝찝하다.

잘난척 하고 싶어서 책을 썼나?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랑의 사다리 플라톤'이라고 검색해서 나온 블로그 링크

링크1 Incomprehensiblis 블로그 

링크2 디자仁 블로그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생각해 볼 거리는 있다. 세상에 자신을 정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하는 것이다. 

  다들 약간씩 이상한 구석이 있다. 페티시로 보자면 다들 조금씩 어떤 것들에 대해 페티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게 얼마나 강한가, 자신이 알아차리고 있는가 따위가 다를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정말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두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이고 모호한 평균치인 '정상'에 자신이 속한다는 환상은 어째서 확신이 되는가. 나는 오히려 자기가 정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상하다. 



말하자면 나는, 짧은 반바지와 힐은 아무 상관 없지만. 모르는 사람을 응시하며 몸을 흔들어 대는 건 상대를 불편하게 하니까 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이 광고는 재미있어서 좋다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