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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즐거움

에바 헬러 - 다른 남자를 만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by Desmios 2011. 10. 10.

다른남자를만나면모든것이달라진다
카테고리 소설 > 독일소설
지은이 에바 헬러 (열린책들,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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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어 제목인 『Beim nächsten Mann wird alles anders』가 본래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구글 번역에서는 '동안 다음 사람, 모든 것이 변합니다'라고 나온다) 이 책은 『다른 남자를 꿈꾸는 여자』로 발간했던 것을 지금의 제목으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제목을 보고, 지금 남자를 갈아치워라! 인 줄 알았는데 그런 내용이 아니었다. 차라리 『다른 남자를 만나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라면 책의 내용이 보다 더 잘 들어났을지 모르겠다.
  '사회와 인간의 실상, 그 허위와 모습을 간파하는' 작가라는 에바 헬러의 책은 이 것이 허위를 풍자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않고 보다간 이내 짜증이 나기 십상이다. "아, 완전히 주인공을 비웃느냐고 이런 걸 보여주는 구나"라고 생각하기 전에는 몇 번이나 책을 그만 읽어야 하나 고민했다. 일단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 주인공 콘스탄체의 눈먼 허영심이 재미있게 느껴진다. 마지막에 콘스탄체가 89마르크 95페니의 인조 사파이어 은반지에 「진짜 보석처럼 보여…….」라고 중얼 거릴 때는 카타르시스 비슷한 것 가지 느끼게 된다.

  내가 남자친구의 연락없음에 잔뜩 골난 채로 지냈던 여수, 내일로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아저씨가 해주신 그 말 그대로이다. 그냥, 남자친구가 사랑한다고 말해주기만 하면 딱 풀릴 것 같은데 그걸 안하니까 그렇게 골이 난 게 아니냐고. 대부분의 여자들, 지성인이라고 자처하는 콘스탄체와, 그 지적 허영심에 있어서 하등 다들 바가 없는 내,가 바라는 것이 이 유치하고 통속적인 말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류의 뻔함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마치 낭만의 환상을 꿈꾸는 골빈 여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스트 셀러에는 베스트 셀러의 이유가 있는 법이므로 때로는 남자 꼬이는 여자들의 전략을 눈여겨 보고 차용하는 용기(나는 용기라고 하겠다)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 책에서는 비웃는 것은 여자들만의 요상스런 낭만 뿐이 아니다.

pp.218-221
「왜 모든 남자들은 딸 나이 또래의 여자들을 꿈꾸는 거지? 근친 상간을 동경하는 것인가?」
(이후 부분생략)
  율리아가 끼어들었다. 「그것은 자아 발견의 남성적인 환상이야.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행여나 변할까 두려워하지.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들 스스로를 변화시켜야만 하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보호해 줄 수 있고, 그들의 나이의 현명함이라고 내세우는 것이 실제로는 나이의 아집이라는 것을 알 수 없을 만큼 경험이 없는 젊은 여자를 필사적으로 찾게 돼.」
「그러면,」침대에서 내가 말했다. 「그런 할아버지하고 침대에서? 그들이 아직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어쨌든 그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할 수 없다면 여자가 자신들의 요구를 만족시킬 만큼 충분히 매력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내 생각에는 우리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한다는 것 하나로 충분한 것 같아. 다른 남자들이, 저토록 젊은 아내를 갖고 있다면 아직도 그것을 할 수 있겠지, 생각하는 것으로 아버지는 만족해 하는 것 같아.」

「아주 간단해. 한 남자가 약 25세까지의 여자를 구한다면 그 광고를 낸 자는 40세에서부터 죽은 거나 다름 없는 사람이야. 그러나 27세에서 34세까지라고 씌어 있다면, 그러니까 나이 상한선이 정확하게 숫자로 제시되어 있다면 그 광고를 낸 자는 정확하게 한 살 더 많다고 장담할 수 있어. 최소한 한 살은 더 많아야 되거든. 그렇지 않으면 광고를 낸 사람의 남성적인 우월감이 붕괴된다고 생각해. 물론 이 두 번째 원칙에 의해서 광고하는 남자들은 보다 젊은 축이야. 오히려 남자가 젊을수록 여자는 나이가 더 많아도 돼. 잃어버린 청춘에의 동경은 마흔 살이 넘어서부터 시작되거든.」

  과연 어린 여자들을 바라는 그 어떤 남자가, 이 것이 바로 자신의 욕망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이 뻔함과 유치한 자기 기만에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수긍을 '용기'라고 표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