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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즐거움

조경란 - 혀

by Desmios 2011. 10. 24.
- 10점
조경란 지음/문학동네

  간만에 아주 배부른 소설을 읽었다. 발터 뫼르스 식으로 얘기 하자면, 오름을 관통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조경란의 혀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형용사는 '감각의 제국'이라는 묘사이다. 영화 '감각의 제국'과 많이 비교가 되면서 연인에 대한 소유욕이 화자되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저 그 제목 그대로, 감각: 미각으로 세운 제국과 같은 치밀한 소설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잊고 있던 감각에 대해 일깨워준 제일 충격적인 소설은 아무래도 쥐스킨트의 향수이지만, 향수에서는 스토리를 따라가느라 조경란의 혀 만큼 민감하게 감각적인 묘사를 향유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혀'의 스토리가 단조로운 것은 아니다. 나는 친구가 이 책을 소개하면서 이미 스토리를 다 말해주었는데도, 이 다음에는 어떻게 이어질지, 친구가 말해주지 않은 어떤 에피소드가 섞여 있는지 이세연 혀를 이용한 레시피를 배워가는 느낌이었다. 이 재료의 기원은, 그 쓰임은, 관련된 에피소드를 찬찬히 말해주는 주인공 정지원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March, p.99
  뚱뚱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나를 통제할 수는 없다. 그 두려움보다 큰 것은 바로 먹는 것에 대한 쾌락이다. 미각은 닦을수록 반짝이는 금강석 같은 것이다. 식욕을 가진 사람은 살아갈 의욕을 가진 자다. 살아갈 의욕을 잃은 사람이 가장 먼저 잃는 감각이 바로 미각인 것처럼. 어떤 사람은 악기를 연주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은 글을 쓰고 있을 때 또 어떤 사람은 쇼핑을 하고 있을 때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느낀다. 최근의 나는 먹고 있을 때 살아 있는 걸 느낀다. 언제 어디서나 먹을 준비가 돼 있다. 게다가 아주 강렬하게 먹고 싶은 게 생겼다. 가질 수 없을 때, 그 욕구는 부풀고 팽창한다.

  작가의 말에는 "다 읽고 나면 입에 군침이 돌게 하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었다."라고 했다. 다 읽고 나서도, 읽는 와중에도 군침 비슷한 게 돌긴 했다. 하지만 식욕에 의한 군침은 아니었다. 정지원이 주방에서 칼을 만질 때도, 떠나간 연인을 생각할 때도, 모르는 남자에게 강간을 주도할 때도, 나는 키스가 하고 싶었다. 쪽이 아니라 쩝쩝으로. 까끌까끌한 혀를 입속 구석구석 훑으면서 나는 간처럼 퍽퍽하고, 염통처럼 쫄깃하고, 순대처럼 부드러운, 그의 입술과 그 속에 담겨 있을 혀를 생각했다.
  구강기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자조하는 나이고, 입으로 하는 대부분의 것을 좋아하지만 이상하게 먹는 것에 만은 그다지 큰 즐거움을 느끼질 못한다. 나에게 있어서 음식이란 그저 다음 날을, 다음 끼니 때까지 살아내게 만드는 에너지원일 뿐이다. 내가 만드는 요리는 그렇기 때문에 모두 먹을 순 있지만 맛있다곤 할 수 없을만한, 생존의 맛 밖에 나지 않는 것이다. 사는 게 매일매일 행복해지면 나도 요리를 잘 할 수 있게 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