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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_설

신오만원권 - 가짜 신사임당

by Desmios 2009. 7. 21.


  신오만원권이 드디어 나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오만원권에 대한 포스팅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오만원권은 커녕 오천원짜리도 자주 보기 힘든 요즘이라, 보지도 않은 주제에 글을 쓴다는 게 좀 우스운 것 같아서 지금껏 미루다가 드디어! 오만원 권을 보게 되었다. 오호라! 이것이 오만원 권이구나, 왠지 때깔도 고와 보인다. 친구의 표현에 의하면 '사과 상자에 더 많이 들어가라고' 만든 오만원 권. 새로 만드는 지폐에는 여성 위인이 들어가는 유행에 맞춰 우리나라도 여성 위인을 넣기로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떠오르는 여성 위인이 별로 없다. 기껏 그나마 유명한 신사임당을 그려 넣었는데 박근혜랑 닮았다는 둥 하는 얘기나 나오고.

  문제는, 신사임당 그림이 박근혜씨와 닮았는가 아닌가 하는 게 아니라. 들어간 위인이 하필 신사임당이라는 것이다. 신사임당 하면 사람들을 뭘 떠올릴까? 그 유명한 수박 그림이나 오죽헌, 누구네 엄마. 말인즉슨, 누구네 엄마인데 그림도 좀 그리고 글도 좀 썼다는 사람이다. 어쩐지 글과 그림은 뒷전이고 누구네 엄마인 것이 더 유명한 것 같다. 백과사전에도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는>이라는 문구가 빠지지 않는다. 그런 점이 마음에 안든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들한테는 "아, 이거 봐 그림도 그렸다니까'"하면서 그림을 닭이 쪼았다는 둥 하는 유치한 변명을 붙인다.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아니 손은 얹지 않더라도 일단 입에 침이라도 바르고 생각해 보면, 위인전에서 신사임당이 그림 그렸다는 얘기는 어렸을 때 그림 그린 얘기 밖에 없다. 시집가서 얼마나 남편을 잘 섬기고 남편 공부 뒷바라지 하고, 애들을 잘 키웠고 공부도 시키고, 시집을 갔는데도 효성이 지극했다 어쩌고 저쩌고 하는 얘기가 더 많다. 그럼 그걸 읽고 배운 애들이 신사임당을 시인이자 화가로 기억할까 현모양처로 기억할까. 명백히 후자다.
  아니 아니라니까! 유명한 화가이고 시인이라서 신사임당이라니까! 한다면 허난설헌은 어떤가? 허난설헌은 8살 때부터 시를 썼다고 한다. 그 정도면 가히 천재적이다. 그런데 허난설헌을 찾아보면 현모양처니 하는 얘기는 없다. 김모씨와 결혼했는데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마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 허난설헌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잘나고 못나고의 문제가 아니라 남편을 잘 못 섬겼기 때문에.

  잠시 다른 것을 생각해보자. 왜 여성 위인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고작 신사임당, 논개, 유관순 정도? 위인이 아니어도 되니까 유명한 여성을 떠올려보면 끽해야 황진이. 아니 왜 그렇게 떠오르는 사람이 몇 명 없을까. (아 선덕여왕이네 명성황후네 하지 말자. 그 사람들이 유명한 건 요즘 드라마에 나왔기 때문이지 무얼 했고, 그 사람에 대해 쓴 책이 애들 필독서이기 때문이 아니다) 양성평등 '원칙'에 따라 여성이 들어가긴 해야 하는데 들어갈 만한 사람이 떠오르질 않는다. 당연하다.   가르치질 않았으니까.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어떤 인물이 "위인"으로 선택 받는 건, 그 사람이 정말 뛰어나서가 아니라 위인으로 숭앙하기에 적절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애들한테 "너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위인이 된다. 많은 남편들이, 개인적인 자질은 뛰어나지만 남편을 못섬긴 허난설헌은 같잖게 보았기 때문에 요즘 사람들이 이름도 잘 모르는 것이고. 많은 아들들이, 남편도 잘 모시고 애들도 잘 키운데다가 그림까지 그린 신사임당은 꽤 보기 좋아 했기 때문에 지폐에도 얼굴이 나오는 것이다.
  평소에 여성 위인을 '만드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여성 위인이 필요한 이런 경우에 "아 그래도 그림 그렸잖아! 아 닭이 벌레 그림이 진짠줄 알고 쪼았다니까!" 이런 변명이나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신사임당의 새로운 쓰임새란 "너도 여자로 태어났으면 이 정도는 해야지 여편네야 어? 그림도 그리고 남편 잘 섬기고 애들 뒷바라지 잘하고"하고 오만원권을 흔들며 타박 할 수 있게 된걸까? 드라마에 한번 안 나온 신사임당이 위인이라며 지폐에 얼굴이 나올 정도면 참 여성 위인을 안 만들긴 안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