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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즐거움/이지적 성

[독서메모] 번 벌로, 보니 벌로 - 섹스와 편견

by Desmios 2009. 10. 27.
섹스와 편견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번벌로 외 (정신세계사,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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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8
 2세기의 그노시스파 지도자인 율리우스 카시아누스(Julius Cassianus)도 마르키온처럼 성에 대해 적대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남녀가 가장 짐승 같을 때는 교접하고 있을 때라고 가르쳤으며, 이 세상에서 예수의 사명은 인간을 교접에서 구원하는 것이었다고 믿었다.

  우리가 생식기를 갖고 있으니까, 혹은 여자는 이렇게 만들어져 있고 남자는 저렇게 만들어져 있으니까, 또 여자는 씨를 받고 남자는 씨를 주도록 되어 있으니까 신이 교접을 허용한 거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만약에 우리가 도달하려고 애쓰는 신이 그런 결정을 내렸다면 고자를 축복받은 자라고 선언하지도 않았을 테고(<마태복음>19장 12절), 예언자가 그런 어리석은 생각 때문에, 스스로 거세한 남자를 나무에 비유하여 고자도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가 아니라'(<이사야서> 56장 3~4절)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p293-294
  성충동의 다양한 형태를 분류하고 해설하고자 하는 열정은 성행동에 낙인을 찍는 것을 의학적으로 뒷받침하는 결과를 낳았다. 사회학자인 하워드 베커(Howard Becker)는 여기에 잠재해 있는 위험성을 이렇게 요약했다.

  사회 집단은 일정한 규칙을 만들어 일탈을 창조해내고, 그 규칙을 특정한 사람들에게 적용하여 그들에게 아웃사이더라는 꼬리표를 붙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일탈은 어떤 사람이 저지르는 행위의 본질적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위반자'에게 규칙과 처벌을 적용한 결과다. 일탈자는 꼬리표가 성공적으로 붙여진 사람이고, 일탈행동은 사람들이 일탈이라는 꼬리표를 붙인 행동이다.

  따라서 어떤 행동을 어떤 특정한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명시하는 것은 의학께만이 아니라 사회에 대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 행동을 일탈행위로 분류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 범주가 너무 넓으면, 거기에 속하는 사람들이 특별한 집단을 이루기 쉽고, 자신이 일탈행위로 규정된 특징을 일부나마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규정에 정확히 일치하는 행동을 하거나 거기에 따르려고 애쓸 수도 있다. 


p335
  데이트 강간과 부부간의 강간이 강간의 범주에 포함되고 성희롱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결과, 남성과 여성의 사회화가 검토된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에서 선구자는 도널드 모셔(Donald Mosher)였다. 남성들은 성적 강요를 여성에 대한 지배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그는 보고했다. 그는 또한 초남성(超男性) 망상에 사로잡힌 '박력 있는 남자'에 대한 예찬을 정의하고, 언론이 남성들의 그런 태도를 부추기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그가 발견한 바에 따르면, 전통적인 남성의 사회화에는 흔히 여성은 섹스에 별로 관심이 없지만 남자가 충분히 설득하고 유혹하면 여자를 성적으로 '눈뜨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후략)






  '편견'이라는 단어에서도 사회과학적 관점이 섞여있음을 짐작할 수 있듯이 책에는 사회학적 관점을 통해 본 섹스와 섹스에 대한 편견에 대해 쓰여있다. 저지인 벌로 부부는 '미국의 저명한 성과학자'라고 하고 '인간의 성에 대한 연구 업적으로 킨제이 상을 공동 수상' 할 정도이니 내용이 가볍게 읽을 만큼 쉬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역시 관심이 있는 것은 좀 어려워도 잘 읽히는 구나. 

  서양에서 성을 적대시하는 이유에 대해서 한 장을 할애했지만 이는 종교-기독교의 금욕주의에서만 그 유래를 찾아 약간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더군다나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성에 대한 또 다른 관점들' 이라고 해서 내용이 꽤 부족하다. 성을 터부시하게 된 이유에 대한 한국 연구는 없나? 기회가 되면 찾아 보도록 하고 아무튼 성에 대한 이중 잣대에 대해서는 여러나라가 참 비슷하다. 고려시대나 조선초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성에 억압적이진 않았다고 하는데 도대체 공자는 무슨 생각으로... 나중에 나중에 알아보자.

  절개를 지킨 과부에게 '열녀문'을 국가에서 세워준다는 것은 그게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