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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즐거움

정이현 - 낭만적 사랑과 사회 091007

by Desmios 2010. 1. 28.
낭만적 사랑과 사회 - 4점
정이현 지음/문학과지성사


  RADA의 ‘SHOW'라는 노랫말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다. "눈에 뻔히 보이는 쌩SHOW, 해먹고 해먹던 사람들만 계속 해먹는 very unhappy한 SHOW" SHOW의 규칙을 모르는 사람은 해먹을 수도 없고 따라갈 수도 없는 온통 SHOW인 세상을 비웃는 내용이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주인공은 자신의 처녀성을 지키기 위해 온갖 SHOW를 다한다.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순차적 절차를 밟은 SHOW 보고 있자니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크게 보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예의범절’이라는 규칙에 따라 누구나 SHOW를 하고 있다. 안부를 묻고 존댓말을 쓰고 내숭을 떨고 거짓말을 하는 것들도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SHOW가 아닌가. 그런 것을 가식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라고 한다면 주인공이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다며 필사적으로 사수한 처녀성 역시 숭고한 투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SHOW를 하고 싶지 않다. 나 자신을 감추고 허세를 부리는 것 같아 답답하기 때문이다. 내가 나이기 때문에 사랑받을 수는 없는 것일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데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속한 속성들을 사랑하는 것은 슬프다고 생각한다. 누구를 좋아하는 이유가 눈이 예쁘기 때문에, 돈이 많아서, 처녀·동정이기 때문이라면 눈을 다치거나 재산을 날리거나 육체적 순결(?)을 잃으면 상대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아무리 이 자본주의 시대가 모든 대상에 (금전적) 가치를 매기는 시대라해도 인간존재 자체까지도 가치를 평가받는 다는 것은 너무나 낭만적이지 못하다. 고로 가치화 된 주인공의 사랑과 처녀성을 위한 투쟁 역시 낭만적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우리에게 낭만이라는 개념(혹은 이데아)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어느 시대에나 ‘이 시대에 낭만이란 죽었다’고 외치지만 모든 시대가 그러하다면 도대체 낭만은 어디에(혹은 어느시대에) 깃들어있었던 것일까.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사람들은 낭만을 찾는 것 같다. 그 것은 자신일 수도 있고 혹은 타자일 수도 있지만 도대체 누구를 위해 낭만을 찾는 것일까. 그리고 그 낭만이라는 것도 모호하기 그지없으며 여자들이 울부짖는 ‘낭만’을 위해 하지 않아도 되는 허례와 허언을 남발해야 하는 세상이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또 다시 그 절차화된 낭만 (1. 샤워는 여자 먼저 ~ 10. 함께 혈흔을 확인한다) 의 과정을 통해 주인공의 처녀성은 가치 평가되어 아주 자연스럽게 물질로 환원된다. 오 숭고한 명품가방.

  낭만 운운 하는 사람들 중에서 낭만가가 없는 법이지만, 이런 낭만타령을 하고 있자니 마치 내가 이상주의자라도 되어 지금이라도 유토피아를 찾아 떠나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결혼 ‘못’한 노처녀에게 쏟아지는 동정과 ‘마지막’ 선 자리를 어떻게 거절할까 하는 상상을 하고 있으면 아직 22이지만 벌써 진절머리가 난다. 독신생활에도 결혼생활에도, 다 헤진 팬티에도 흰색 실크 팬티에도 낭만이 없다면 도대체 낭만이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

  그러고 보니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었다.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하거나 오히려 불을 붙여주기까지 하는 남자애들이 더 보수적인 법

  하지만 ‘누나 담배피면 기형아 낳는데요.’
 하는 애들에게는 고맙다고 해야 할까 상관 말라고 해야 할까. 어느 쪽도 낭만적이지 않지만 나는
            ‘내가 네 애를 낳을 건 아니잖아’
라고 해주었다. 역시 낭만적이지 않은 것 같다.






'현대사회와 여성' 수업시간에 썼던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