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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_설

Nintendo Wii Boxing - 나는 너를 때려눕힌다

by Desmios 2010. 10. 27.


인간의 내면에 있는 폭력성에 대하여

  인간에게는 본능적인 폭력성이 존재한다. 수치심, 굴욕감, 자만, 트라우마, 권위의식, 분노, 당황 등 그 근원은 다양하지만, 이런 여러 감정들은 모습을 바꾸거나 증폭되어 폭력으로 드러난다. 이를 보고 자연스럽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be폭력주의자 간디

(문명)간디도 그러한데 우리라고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런 폭력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정신적, 물리적인 피해를 가져오게 되고 이를 막기 위해 지금까지 여러 가지 방법들이 동원되어 왔다. 규율과 문화, 종교가 바로 그것이다.  문화와 종교 또한 그러한 폭력성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볼프강 조프스키의 「폭력 사회」의 구절을 빌어 말하자면

 “종교는 이념(종교적 가치, 이곳에서는 사랑과 자비의 이념이라고 보자)을 관철시키기 위해 희생물을 만들어내고, 폭력을 막기는커녕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이단을 배척하는 데 사용했다. 종교전쟁이 언제나 가장 참혹하게 진행되는 이유는 바로 이단을 근절해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인용 출처 : 폭력은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 - 조프스키 저 『폭력사회』

  국가 간의 전쟁을 스포츠로 승화 시킨 것은 폭력을 순화시킨다는 아이디어가 가져온 결과이다. 스포츠맨십이란 잘 포장된 허울 좋은 양복에 불과하다. 그 안에는 인간의 내제적인 폭력성이 너를 이기고 싶다는 욕구로 순화되어 잘 갈무리 되어 있다. 폭력성이 억압될 경우, 한계에 다다른 압력밥솥이 터져 나가는 것 처럼 아주 기형적인 모습으로 폭발해 버리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억압이 아닌 잘 포장된, 순화된 해소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포장에 현대의 미디어가 일조하고 있음은 쉽게 알 수 있다.


미디어-게임의 폭력성

  영화, TV, 만화, 애니메이션 등 폭력성을 주 소재로 하는 많은 미디어들이 있지만 게임은 하는 사람의 실제적인 움직임을 필요로한다는 점에서 그 폭력성에 대한 논의가 끊이질 않는다. 2001년에 한 중학생이 손도끼로 동생을 살해한 사건에 대해서 미디어는 그가 플레이했던 게임(조선협객전, 이스이터널, 영웅전설[각주:1])과 연관시켜 게임의 폭력성을 목 놓아 부르짖었다. 게임으로 지적된 살해원인의 적합성에 대한 검증은 논할 수 없지만, 이후로 게임의 심의 등급이 엄해졌음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게임과 스포츠를 결합해 포장한 폭력성의 경우는 어떨까.


닌텐도의 Wii(귀찮으니까 '위'라고 해버리자) 게임기의 위스포츠 종목중 복싱 (위복싱)을 중심으로 게임과 폭력, 그리고 닌텐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Catharsis of Blood-free Boxing

  폭력성 짙은 영화를 보는 시청자가 영화를 통해 폭력에 대한 카타르시스[각주:2]를 느끼는 것은 주인공을 마치 자신이라고 느껴서(다른 말로 동일시 라고 한다) 대리만족을 느끼기 때문이다. (폭력영화의 저열한 속마음에 대한 이전 포스트 : 파이트클럽 링크)


홍대 we wii cafe _ 분노의 위복싱

  그러나 게임은 동일시의 과정 없이 행동하는 게임 캐릭터 자체를 자신의 분신, 아바타로 느낀다. 더군다나 위는 리모컨을 통한 모션 캡처로 게임이 진행되기 때문에 단순히 의자에 앉아 게임 컨트롤러를 잡고 즐기는 게임에 비해 그 동일시 정도가 더욱 강하다. 동시에 위복싱은 게임을 통해 드러나는 폭력성을 실제보다 더욱 순화된 모습으로 보여준다. 여러 번 다운되었다가 일어난 캐릭터는 그저 땀을 많이 흘릴 뿐이고(좀 많이 비오듯 흘리긴 하지만), 복싱에서 연상 할 수 있는 상처와 피는 표현 되지 않는다. 직접 몸을 움직이고 주먹을 뻗는 동작에서는 강한 동일시를 가져오지만 동시에 폭력이 주는 부정적인 이미지에서는 피해 있다.


폭력성을 제거한 폭력

  더욱이 위복싱은 폭력이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차별을 일소한다. 어떤 경기 종목에도 사람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위계가 존재한다. 모든 사람이 피해 갈 수 없는 노화의 문제를 제외하고도 성별, 체격, 인종, 언어, 출신, 자본 등의 갖가지 요인들은 백 미터 달리기에서 흑인을 언제나 우승하게 만들고 컴퓨터 게임 대회에서 선진국 팀에 우승컵을 안겨준다. 이 선천적, 후천적 차이를 메우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야 하고, 신체적인 어려움이 있는 사람에게는 동일 선상에 설 수조차 없는 상황을 만든다.

 그러나 위복싱은 이러한 여러 차이를 전략적으로 평등화 시킨다. 그 곳에는 남자, 여자, 어린 사람, 장애를 가진 사람이 없다. 컨트롤러를 쥘 두 손과 화면을 볼 수 있는 눈만 있으면 된다. 황금을 입힌 리모컨을 휘두른다 해서 상대보다 더 센 필살기가 나가는 것도 아니고 키가 작다고 해서 게임 아바타의 주먹이 상대 얼굴에 닿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인터넷에서 기술을 넣는 방법을 찾아 볼 수 있다고 해도 오늘 처음 위복싱을 해본 친구에게도 질 수 있다. ‘너를 때려눕히고 싶다’는 폭력적 승부욕은 모든 조건을 동등화한 상태에서 순화된 표현으로 걸러진다. 다시 말하자면 위 복싱은 여자가 남자를, 아이가 어른을, 장애인이 비장애인을 거꾸러트릴 수도 있다. 폭력이 가진 폭력성이 제거된 순수한 폭력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위를 통해 인간의 폭력성을 부작용 없이 충족시킬 수 있지 않을까.



배보다 배꼽이 더 크지!

  분명 위복싱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불평등한 신체를 평등하게 만드는 전략은 존재하지만, 닌텐도 위와 이를 연결해 보여주는 화면이 필요하다는 선결 조건이다. 위복싱만 생각해 볼 때는 닌텐도 위 하드웨어와 위 스포츠 게임 소프트웨어 이외의 액세서리는 복싱장갑 하나 밖에 없지만 닌텐도 위 하드웨어에 해당하는 액세서리는 차고 넘친다.
 

‘Wii fit’을 사면 보다 열심히 운동 할 수 있을 것 같고, 핸들을 사면 레이싱 게임을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고, 재퍼를 사면 더 많은 좀비를 죽일 수 있을 것 같다. 실리콘으로 된 리모컨 커버는 물론이거니와 ‘Wii fit'을 위한 요가 매트까지 판매되는 것을 보면 마치 아이팟/아이폰에 관련한 액세서리 시장이 어마어마한 것처럼 위에서 파생되는 부가수입도 만만치 않은 듯하다.

네이버웹툰 놓지마 정신줄


소비를 부르는 소비

 마르크스가 오래전 소비사회에서 비판 한 것처럼 자본주의는 상품의 과잉생산을 통한 이익의 창출을 위해 상품 소비에 대한 필요성을 날조한다[각주:3]. 소비가 또 다른 소비를 부르는 것이다. 닌텐도 위가 처음 발매 된 이후, 여러 이벤트 경품에서 위를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다. 이는 업체 측에서 하드웨어를 무료로 나누어 주는 데 드는 비용보다 그것을 가진 사람이 앞으로 사게 될 수많은 소프트웨어와 게임 보조기구들이 주는 부가 소득이 더 많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가족, 친구 사이의 화목 도모라는 목적을 달성한 이후에 위를 재활치료에 이용하기도 하지만, 자본주의가 가지는 어쩔 수 없는 한계에서 위 역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위복싱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매번 위복싱에 시간과 돈을 쏟는 것이야 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버터를 바르는 칼이 하나뿐이라 다른 사람이 버터를 바르고 자신에게 칼을 넘겨주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은 자신의 티스푼으로 버터를 바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다. ‘버터 바르는 칼’이라는 위조된 필요성에 익숙해진 자본주의의 충실한 노예인 것이다. 미디어에서는 허구의 필요에서 자유로워지자, 사고 싶지 않다는 욕망, 욕망을 참을 줄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는 전하지 않는다. 동창회에 가기 위해서는 명품백이 하나쯤 있어야 하고, 가족들과 즐겁게 놀기 위해서는 위가 꼭 있어야 한다는 허위뿐이다.



나뭇가지 하나만 가지고도 백 여든 세 가지 놀 수 있는 방법을 생각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현대에 와서 창의력이 줄어들어 똑같은 컴퓨터 앞에 앉아 똑같이 놀게 된 것이 아닌 만큼 이것이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인가, 소비의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은 없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The End of Wii Boxing

  닌텐도 위 발매 후 위복싱을 광고하는 것을 본고 직감적으로, 나는 저 게임을 매우매우매우 좋아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게임 콘솔을 살 여유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빠져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일부러 위방에도 가지 않았다.  어느 날 우연히 위를 하게 되었고(이건 운명이야!), 그 이후로 이 친구 저 친구를 졸라 위방에 뺀질나게 다녔다. 가까운 대학로 위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이 얼굴을 기억하는 지경이 되었지만 현재는 위복싱에 시들해졌다. 그것은 흥미
가 떨어진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때려눕힐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이겨보고 싶었던 사람들은 이미 다 이겼고, 위복싱을 처음 해보는 햇병아리들 정도는 적당히 주먹을 휘둘러 정신없게 만들어 줄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복싱을 배웠다는 동아리 후배를 이긴 것을 마지막으로 위방에 발을 끊었다. 집에서 혼자 A.I.를 상대로 연습을 할 요량으로 위를 살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지만 위를 하려면 텔레비전도 사야하고, 게임 소프트웨어도 사야하고, 그리고 막상 위가 있으면 또 다른 게임이 해보고 싶어서 또 다른 게임 소프트웨어를 살 것이 눈에 선히 보였다.
(실제로 바이오하자드를 하느냐고 위방에 돈을 엄청 꼴아박았다)


여전히 널 때리고 싶다

그러나 내면에는 여전히 충족되지 않은, 지속적으로 자극되는 폭력에 대한 욕구가 존재한다. 폭력이 충족될 수 있는 것이라면 세계 대전을 두 차례나 치르고 나서도 이라크 전쟁이며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할 이유가 없다. 채울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은 이를 억압해서 터져 나오게 하는 것보다는 K-1, F1 그랑프리, 영화, 게임

캐나다 몬트리올 F1 대회 사고

수억 되는 차가 박살나는 건 최고로 신난다♬



등으로 대리만족을 느껴 폭력성을 다스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어차피 무언가에 이 분노를 쏟아내야 한다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운동도 되는데다가 재밌기까지 한 위를 사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자기 합리화가 치미는 바람에 자주 인터넷 중고시장을 기웃거리기까지 한다. 무엇보다 넉넉지 못한 주머니 사정의 이유로 매번 씁쓸하게 자신을 달래게 되지만 과연 언제까지 이 욕망을 참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1. 영웅전설을 플레이 해봤던 사람이라면 모두 이 게임과 폭력성을 연관시킨다는 것에는 웃음이 나올 것이다. 나는 영웅전설시리즈중에 하얀마녀를 제일 열심히 했는데, 그 훈훈함이란! 영웅전설을 플레이하고 손도끼로 동생 목을 찍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되는대로 말만 지껄인다는 증거이다. [본문으로]
  2. 카타르시스(그 catharsis)【명사】 1. 『문』 비극의 감상으로 평상시 마음속에 억압되어 있던 감정을 해소하고 마음을 정화하는 일. 2. 『심』 자기가 직면한 고뇌 따위를 외부에 표출함으로써 정신의 안정이나 균형을 찾는 일《정신 요법으로 많이 이용됨》.여기서는 1번의 의미이다. [본문으로]
  3.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무엇이든 팔아먹고 또 팔아먹기 위해 끊임없이 새 상품을 만들어 내고 이 상품의 필요성을 홍보한다.예를 들어, 본래 전화통화의 기능인 휴대폰에 카메라니 게임이니 이것저것 잔뜩 집어 넣고 소비자에게 요즘 시대에 카메라도 없는 휴대폰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있느냐는 강박을 느끼게 한다.미디어가 그런 날조된 필요성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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