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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즐거움/이지적 성

아베 코보 - 모래의 여자

by Desmios 2014. 12. 31.
모래의 여자 - 6점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민음사


  새로 이사 온 이 동네는 책의 불모지다! 

아니면 사실 지금까지 내가 책을 접하기 쉬운 환경에서만 살아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는 도서관이 먼 동네에 살았어도 학교 도서관이 있었던 덕분에 항상 쉽게 책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이 학교도 안나가게 된 마당에 도서관이 근처에 없자 정말 힘들어졌다. 동사무소 문고에서 책을 빌려 보다가 연체를 하게 되어 몰래 책반납함에 넣고 도망나온 지금에는 기를쓰고 도서관에 가지 않으면 이 언덕 위로 책을 들고오기가 막막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한 권의 책을 보기 위해 도서관에 갔다가 예정 없는 녀석들을 잔뜩 업어오는 버릇을 고치질 못하겠는 것이다. 한두권도 아니고 네다섯권쯤 되다보면 얇고 재밌는 책은 이틀만에 다 읽어버리고 두껍고 재미없는 책은 안 읽고 반납해 버리는데 넌덜머리가 난다.

어쩔 수 없이 친구 문고를 이용하게 되는데, 서가란 한 사람의 취향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고로- 그 녀석의 책 취향은 나와 공유하기에는 너무나 멀어져 버렸다. 노잼! 노잼! 그래도, 민음사 전집은 대부분 항상 재미있다.


  딱히 반전이랄 것도 없는 스토리를 이야기 해버리면 작가의 나름 재치있는, 책 뒷편의 소개에 의하면 "서스펜스와 철학적 인식의 깊이가 환상적으로 어우"러진 흔적 이외에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어지므로 말 할 수 없다. 그러니 그의 작품에 나온 단상 중 한 가지 이자, 내가 흥미롭게 읽었고 내 친구도 책갈피를 추가해 놓은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물론 [이지적 성]이라는 카테고리에 걸맞게 성에 관련된 내용이다. 


제2장 chap.20


pp 132-133

  단, 어렴풋이 성욕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있다. 예를 들어 뫼비우스의 띠(여기서는 실제 뫼비우스의 띠가 아니라 직장 동료를 지칭하는 별명이다)란 놈은, 여자 친구를 꼬실 때 반드시 미각과 영양에 관해서 강의를 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모양이다. 원래부터 굶주린 자에게는 일반적인 먹을거리가 있을 뿐, 특등 쇠고기니, 국내산 굴이니 하는 것은 미처 존재하지 않는다…

…. 일단은 배가 부를 수 있다는 보장이 있어야 비로소 개개의 미각도 의미를 갖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욕에 대해서도 우선은 일반적인 성욕이 있고, 그 다음에야 다양한 성의 맛이 발생하는 것이다……. 성도 일률적으로 논할 것이 아니라, 때와 장소에 따라서 비타민이 필요하기도 하고, 또 장어 덮밥이 필요하기도 한 것이다. 그야말로 정연한 이론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이론에 따라서 성욕 일반, 또는 고유의 성을 자진하여 그에게 바친 여자 친구는 아직 한 명도 없었던 것 같다. 당연한 일이다. 남자든 여자든, 이론에 넘어가는 인간이 있을 리 없다. 멍청할 정도로 성실한 뫼비우스의 띠도 그런 것을 다 알면서도 오로지 정신적인 강간이 싫은 나머지, 열심히 빈 집의 벨을 눌러대는 것이리라.

  물론 그 역시 순수한 성관계를 꿈꿀 만큼 낭만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은, 아마도 죽음을 향해 어금니를 드러낼 때나 필요한 것이다……. 시들어가는 조릿대는 서둘러 열매를 맺는다…. 굶주린 쥐는 이동하면서 피투성이의 성교를 반복한다……. 결핵 환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섹스에 몰두한다……. 그 다음에는 계단에서 내려오는 수밖에 없다……. 탑의 꼭대기에 사는 왕이나 지배자는 오로지 할렘의 건설에 정열을 기울인다……. 적의 공격을 기다리는 군인들은 한시를 아까워하며 자위에 심취한다…….

  그러나 다행히, 인간은 죽을 상황에 그리 쉬 노출되지 않는다. 겨울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진 인간은, 계절적인 발정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 무기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워진다. 질서가 찾아와 자연을 대신하여 어금니와 손톱과 성의 관리권을 접수한다. 그래서 성관계도 통근 전철의 정액권처럼, 사용할 때마다 반드시 개찰구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게다가 그 정액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할 필요도 생겼다. 그런데 그 확인이란 절차가 질서의 성가신 부분을 꼭 닮은 번거로운 것이어서, 모든 종류의 증명서

… 계약서, 면허증, 신분증명서, 사용허가증, 권리증, 인가증, 등록증, 휴대허가증, 조합원증, 표창장, 어음, 차용증, 임시허가증, 승낙서, 수입증명서, 보관증, 나아가 족보에 이르기까지…. 아무튼 생각나는 모든 종잇조각을 총동원해야 하는 상황이다.


말인즉슨, 매일매일 끼니걱정을 하지 않게 되고서나야 사람들은 맛집에서 고걸 먹겠다고 줄서서 기다리는 상황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 역시 겨울이 되어 죽기 전에 인간의 명맥을 이어야만한다는 강박이 없어진 다음에서나 여러가지 성적 취향으로 분화 발전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성이 인간계 생존을 위한 절박한 수단이 아니게 되어버리자, 사람을 편하게 살게 만들어 준 사회 즉 질서라는 것들이 이 성을 통제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나름 재미있는 생각인 것 같다. 대부분의 동물이 봄에 발정기가 있는 데 비해 인간은 뭐 일년만년 발정기인 셈이니까. 하지만, 성은 지금이나 예나 언제나 통제의 대상이었다. 옛날 부족시대 사람들이 먹고살기가 쉬워서 근친상간, 친족간 결혼을 금지한 것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현대 사회에서의 질서가 성을 통제하는 수단이 종잇조각이 되었을 뿐이다. 온갖 증명서와 종이돈말이다. 



그나저나 유동체인 모래와의 사투, 곤경에 처한 남자의 정신적 변화가 주제인 책일 텐데 기억나고 보이는 건 이런 내용 뿐이니 나도 뭐